미움 받을 용기 책을 읽게 된 이유
2022년 초에 마음이 힘들어 네이버에 위로의 책을 찾다가 미움 받을 용기를 사서 읽게 됨.
이틀만에 정독하고 그뒤로 틈틈이 중간중간 읽어 보기도 했음.
아직도 미움 받을 용기의 내용을 상기하며 살아감.
주변에 추천도 많이 해줌.
그만큼 변화된 내 생각이 마음에 들었음.
변화한 생각
아들러의 심리학을 이야기했다. 아마 작가가 아들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작가 이름은 기시미 이치로 일본인이다.
이 작가 덕분에 아들러라는 심리를 알게됐다.
어쨋든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이 전부 아들러 심리학과 관련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내가 온전히 받아 들인 느낌이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
첫번째,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트라우마를 흉터? 라고 해야할까?
트라우마는 내가 상처를 받아 치유가 잘 되지 않아 남아 있게 되는 흉터 느낌이다.
20대 대학 교양과목에서 심리 관련 과목을 들었다.
그때 인적성검사를 한것 같다. 교수님은 나를 따로 불러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얘기했다.
무료로 상담을 해주겠다고 했다. 한번 가고 그뒤로 가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무슨 정신적으로 힘든가? 하는 의문이 들었고 와닿지도 않았다.
평소 느끼는 우울감이야 원래 다 이렇겠지 하고 넘기던 때였다.
나에게 힘들게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무지함이 나를 더욱 고달프게 했다.
작가가 말하는 트라우마를 부정하라는 말은
만약 내가 화가 난다면 이것이 화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닌 화라는 도구를 가져다 쓴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내용이 참 신선한 충격이였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하면서..
그렇다면 지금까지 나는 트라우마를 안고 괴로웠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다.
부모님으로 부터 받은 정서적 학대가 나를 괴롭혔는데 이것 내가 지금 괴롭고 싶어서 그 생각을 떠올린다고 생각을 하니 괴롭지 않아졌다.
지금 내가 우울이라는 도구를 가져다 쓴것일 뿐이였다.
내가 우울하고 싶어서 과거의 기억을 안좋게 불러 들인것이다.
물론 과거의 기억이 행복한것만 있다면 그사람은 행복하게 살겠지, 그러나 사람은 한가지 이상은 불행하다 생각한게 있을 것이고
힘들고 슬픈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그런 것을 떠올렸을 때 내가 지금 우울하고 싶어서 과거 감정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꺠닫고 나니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더이상 우울함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우울함을 가져다 쓰지 않았다.
두번째, 나와 타인의 과제 분리
이것은 아직도 힘든 나의 과제이다.
나는 항상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아니 그걸 느끼며 살았다.
왜 그렇게 눈치가 빠른지 싫기도 하다, 가끔 눈치 없을 때에 타인이 나에게 지적을 하면 또 그게 그렇게 싫다.
어쩌면 나는 눈치있는 사람이야 하고 나를 생각했던것 같다.
그런데 타인의 지적이 있으니 나의 생각을 꺾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나빳나보다.
나와 타인의 과제에대한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타인과 대화 중 어떠한 말을 했을 때, 그말이 상대에게 상처가될까? 기분 나쁠까? 하는 고민을 버리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 하고자 할때 그말이 상대가 기분이 나쁠지 안나쁠지 판단은 상대의 과제라는 얘기다.
막말 하라는건 아니다.
여지껏 나는 나의 생각을 또렷하게 얘기못하는 사람이였다.
어물쩡 이야기하거나, 상대가 그렇다하면 그런가? 하고 넘어가거나, 끌려다니는 삶을 산것 같다.
좋은 쪽으로 끌려갔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비행 행동을 나도 따라갔다.
그결과 가족들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다.
아마 과제라는 것이 나의 선택에 있어 상대의 선택과 나의 선택을 분리하라는 말인것 같기도 하다.
좀 복잡한 이야기가 되는 듯 하지만 일단 적어본다.
그리고 상대의 과제를 뺏어서 굳이 내가 또 걱정을 껴안을 필요도 없다.
세상 쿨하게 살면 되는듯ㅋㅋㅋㅋ
쿨한 사람보면 쿨내나지만 그게 멋져 보인 이유가 이거였나?
미련두지 않기, 흘려 넘기기, 그러거나 말거나, 이런 뉘앙스가 조금은 맘편하게 사는듯
세번째, 열등감 곧 인정중독에서 벗어나기
열등감이 생기는 이유는 인정받지 못해서?
그런데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아이를 키우면서 인정해주고 받아주는걸 많이 한다. 그런데 이 내용에서 조금 의아했다.
어떻게 해야하지? 하며 고민도 했다.
또 정신과 의사들이 하는 이야기 들어보면 과거 인정을 많이 받지 못했다면 자존감이 낮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더 크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어릴적부터 인정을 주구장창 해줘야 하는 건가?
근데 오히려 한번 맛보면 그 맛이 좋아 계속 먹게 되는 것처럼 인정도 한번 받고나면 기분이 좋아 또 받고 싶은 그 느낌 아닐까?
이것이 인정 중독인듯
이제야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최근 엄마와 이야기를 하는데 나의 변화된 생각과 행동에 대해 이야기 했다.
엄마는 그에 대한 대꾸를 "이제야 엄마가 바라는대로 됐다", "그렇게 생각하길 기도했다" "감사하다"
이런 말을들 나에게 했는데 그땐 몰랐다.
집에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가 엄마에게 인정받고자 한 행동이 아닌데 엄마는 왜 저렇게 말하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지낸다 그저 내용을 전달했을 뿐인데 인정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엄마 마음대로 인정을 해준다.
참 기분이 나빳다.
그뒤로 그렇게 하는 내자신이 싫었다. 그렇게 살기가 싫어졌었다.
참나 이것도 아직 나는 어린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어쨋든 발화를 준건 엄마니까?
참 희한하다. 인정해주면 기분이 좋고 좋아야하는데 별로 기분 나쁘다.
난 당신에게 평가받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사는게 아니에요. 그냥 내가 좋아서 즐거운 삶을 살 뿐이에요.
라고 말하고 싶다.
평가 받고 싶지 않다. 내삶 온전히 나만이 알아주는 삶을 살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나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 아닐까?
네번쨰, 타자공험
타자공헌이 잊혀지지 않는다.
성격상 남에게 뭐든 해주고, 퍼주는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런게 기분이 좋았다.
내면의 나라는 사람이 그런것 같다.
타자공헌이라는걸 보고 알았다.
그리고 죽기전 무엇이든 남기고 가야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뒤로 글을 계속 쓰고 있다.
나의 자녀에게도 두고두고 힘이 되어줄 기록을 짧게 써두고 있다.(매일 쓰지는 못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
나의 부모는 나에게 무엇을 남겨줬지?
키워준건 감사하다. 그러나 그건 부모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를 낳았으니 책임을 지는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의 자녀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성인이 되었으니 나를 책임지는건 나뿐이다.
그런 나 자신이 무언가 남기고 간다면 무엇을 남길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그리고 더욱더 남을 위해 무언갈 하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다.
지금은 타자공헌에 대해 조금 내려놓긴 했다.
부자들은 기부를 그렇게 많이 한다는데, 타자 공헌으로 또 부를 창출한다는 세상의이치? 라는 정의를 내려본다.
이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어느정도 맞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왜 부자 이야기가 나왔지?
여튼 내가 베푸는 만큼 나에게 돌아온다는 사실은 반박 불가이다.
경험한것으로
베푼다는게 금전적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베푼다는 것 그걸 하기 위해 계속 배우고 나아간다.
오늘 하루도 생각의 크기를 키워서 조금 더 나은 나를 발견 해본다.